프랑스 레스토랑 발전사 – “전설적인 요리사 등장하다”

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과자의 핵심인 단맛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세계의 지형을 흔들고 역사를 뒤바꿔 놓았다. 설탕을 놓고 오랫동안 전쟁이 벌어졌고 노예무역이 횡행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이러한 ‘맛’의 힘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국가 차원에서 활용해 온 나라가 프랑스이다. 실제로 가 봤든 안 가 봤든 프랑스 하면 미식가의 천국,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 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 >(이케가미 슌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강혜영 그림, 돌베개출판사)의 저자 이케가미 슌이치는 과자가 바로 프랑스 미식 전략의 꽃이자 핵심이라고 보고, 프랑스 역사와 과자의 긴밀한 관계를 새롭게 포착해 낸다.

 

Editor’s Note : <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이케가미 슌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강혜영 그림, 돌베개출판사)에서 본문과 도판 일부를 돌베개 출판사의 동의 아래 발췌해 전달한다. 프렌치 요리를 하고 있는 요리사뿐만 아니라 요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 레스토랑의 발전

프랑스 혁명 후 특권 계급이던 대다수 귀족은 몰락했지만, 시민 중에는 부유층으로 진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다가 일자리를 잃은 요리사 가운데 다시 취직할 곳(귀족의 집)을 찾지 못한 사람은 자기 손으로 마을에 가게를 냈습니다.

이를테면 부르봉가에서 갈라져 나온 샹티이 성주 콩데 공은 바스티유 습격 후에 망명했는데, 요리사까지 국외로 데려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식으로 이름을 날린 콩데 공의 요리사들 중 중심인물인 로베르Robert가 리슐리외 거리 104번지에 본격적인 레스토랑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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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왕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나중에 루이 18세)을 섬기던 주방장 보빌리에Antoine Beauvilliers도 혁명 후 레스토랑을 냈습니다. 그는 나중에 미식의 중심지로 유명해진 화려한 팔레 루아얄 거리 한구석의 갈레리 드 발루아galeries de Valois, 즉 발루아 회랑에 가게를 냈습니다. 그곳은 호사스러운 장식으로 꾸며진 멋지고 쾌적한 최고의 레스토랑이었다고 합니다.

이 무렵 파리에는 저널리스트, 외국 스파이 및 사절, 의원 등 독신자가 많았는데, 그들에게는 외식을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 아주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예산과 몸 상태에 맞춰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를 수 있을뿐더러 가게가 열려 있는 동안에는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시스템이었지요. 그때까지는 커다란 식탁 하나에 둘러앉아 정해진 시간에 내놓는 정해진 요리를 먹는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떠돌이 나그네, 자택에 부엌이 없는 동네 사람, 토박이 기술자, 노동자들도 한데 어울려 여관이나 트레퇴르traiteur라고 불리는 식당에서 ‘정식만 나오는 식탁’인 타블 도트table d’hote에 앉아 얌전하게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메뉴가 나오고 조리가 형편없더라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거나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파리의 레스토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가 늘어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의 집정 정부, 제1 제정 시대, 왕정복고 시대 등을 거쳐 점점 증가했고, 1827년에는 무려 3,000곳에 달했던 듯합니다.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이라 할 만한 것은 대개 파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파리는 여행자가 특히 많이 찾아오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1850년대 관찰 기록에 따르면 파리에서는 신분을 불문하고 친구와 밖에서 식사하는 붐이 일었고, 특히 일요일이나 축제일에는 외식하는 경향이 완연히 자리 잡았습니다.

요리사들이 귀족의 저택을 떠나 마을에서 레스토랑이나 식당을 열기 시작하자, 프랑스 요리는 한층 더 세련되어지고 민주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비범한 학자나 예술가들이 점점 더 음식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비평을 가하는 등 미식의 전당을 건설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입니다.

 

| 국민 요리사의 등장

이런 분위기에서 요리사 중에서도 국민적인 명성을 얻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뱅상 라 샤펠 Vincent la Chapell, 마리 앙투안 카렘Marie-Antoine Carême, 위르뱅 뒤부아Urbain-Dubois,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 등 근대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다진 요리계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현대 프랑스 요리의 개혁자 폴 보퀴즈Paul Bocuse 나 장 트루아그로Jean Troisgros 도 그러한 선인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삼았겠지요. 위대한 요리사들의 연면한 계보는 확실히 프랑스 근대 문화와 사회 전체의 동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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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          source : pinterest.com

이들은 제정과 왕정복고 시대에 상류층 시민들을 위해 옛 궁정 요리를 더욱 세련된 형태로 부활시키고 보급하는 데 힘을 다했습니다. 또한 요리와 과자의 ‘장식’에 관해 철저하게 연구해 후세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레스토랑과 달리 과자점은 잘되리라는 보증이 전혀 없었기에 가게를 여는 데 용기가 필요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루이 16세의 요리사였던 자케Jacquet라는 사람이 포세 드 몽마트르 거리(지금의 아부키르 거리)에 과자점을 내자 의원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팔레 루아얄, 생토노레 거리, 생마르그리트 거리(현재의 트루소 거리)에도 과자점이 점차 꽤 많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면 과자점의 수는 한꺼번에 부쩍 늘어납니다. 귀족과 부유한 시민 가정에서는 요리사를 고용했고, 고용 요리사들은 스프와 전채 요리, 찜 요리와 구운 고기 요리를 훌륭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앙트르메나 과자,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면 또 다른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과자를 먹고 싶으면 따로 주문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뒤에서 소개할 피에스 몽테라는 과자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파티시에를 고용하기도 했지만, 혁명 후에는 귀족뿐 아니라 부르주아와 재계 인물들도 과자를 더 많이 원해서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당시 아바이스, 장드롱, 르제, 라포르제, 바이이, 로제 등이 파리 시내에 가게를 낸 듯한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새로운 파티시에를 더욱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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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과자 장인 마리 앙투안 카렘은 『파리의 왕실 파티시에』Le pâtissier royal parisien(1815)에서 산책을 하다가 수준 높은 과자점들이 차례차례 파리에 문을 여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기술 향상으로 파티시에들이 일솜씨가 세심해졌을 뿐 아니라 주문이 늘어남에 따라 가게 외양도 예뻐졌다고 합니다. 카렘은 자신의 작업과 저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자랑도 합니다. 카렘 자신도 1803년에 라 페 거리에 자신의 과자점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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