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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문화, 독상 – 각자에게 주어진 품위 있는 식사법

예전에 어른들이 두런두런하시는 말씀 중에 이런 게 있다. “밥도 겸상을 척 차려내고, 참 대접이 달랐어.” 집에서 식구들끼리 늘 겸상을 먹는지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겸상은 계급적 해석이 가능한 식사법이라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옛날, 할아버지가 누구누구와 겸상을 받았다는 건 아주 살갑거나 식구처럼 가깝거나 특별 대우를 한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어지간하면 독상이었다. 개다리소반이 상징하는, 사람마다 각기 똑같은 상을 받았다. 독상은 대단히 독특한 우리 음식 문화다.

겸상1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독립된 상에 같은 음식이 배급됐다. 한 끼니 때에는 집안의 식구들은 계급 차이와 관련 없이 같은 음식을 ‘독상’으로 받아서 ‘함께’ 먹었다. 옛 객주나 주막의 그림을 보면 소반을 각기 받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있다. 겸상을 받으면 될 걸, 왜 굳이 독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먹었을까. 그 깊은 음식 사회사를 나는 아우를 안목이 없다. 점차 우리는 겸상 문화가 되었고, 겸상을 넘어 큰상을 펴고 함께 먹는 문화가 되었다. 서양에서도 독상 문화가 있었지만, 서양에선 근대에 들어서면서 독상 문화가 없어졌다. 주군과 노예, 영주와 농노 같은 계급적 차별이 붕괴된 것과 일치하는 역사적 시점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의 봉건 영주나 귀족은 독상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존재를 주변에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절대 군주는 연회에서도 혼자 음식을 먹었다. 군주가 칼로 고기를 썰어 아랫사람들에게 베푸는 행위로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했다. 음식의 주도권은 곧 권력이고, 계급이었다. 지금도 공사나 관공서 같은 곳에서는 장(長)이 주로 먹는 테이블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여전히 군대에서 지휘관이 먹는 테이블은 하다못해 단(檀)을 10cm라도 올려서 일반 식탁과 차별을 둔다. 군대 시절 소대장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처음 자대에 와서 장교 선임들이 하던 말 중에 이런 게 있더라고. 화장실과 식사 자리는 사병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야신’이라고 불리는 야구감독 김성근은 절대 선수들과 밥을 같이 안 먹는다. ‘가오’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감독이란 선수들에게 어느 정도 신격화된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지론인 것이다. 그는 엄하게 가르치고 이끄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가 다른 것도 아니고 밥만큼은 혼자 먹는다는 건, 어떤 강렬한 상징의 기운이 퍼져 나온다. 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이 수라를 드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왕이 음식을 먹는 건, 강력한 권력 행사의 신격화로 떠받들여진다. 음식은 곧 그 계급의 우주다. 앞서 밝혔듯이 독상은 하나의 우주가 음식상에서 이루어진다. 간장과 김치는 ‘첩’에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해와 달처럼 기본으로 깔린다. 그리고 계급에 따라 3, 5, 7, 12첩 등 반찬 수가 달라진다. 독상은 차리는 사람은 불편할지 모르나, 음식으로서는 완전에 가깝다.

독상2

같은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은 독상을 받아야 비로소 완전하다. 무슨 말인가. 겸상을 하면 그 자리의 권력자가 음식을 독점한다. 한 토막밖에 오르지 않은 간고등어에 부하나 아랫사람은 젓가락을 댈 수 없다. 먹는 그 순간에도 자유의지가 억압받는다. 반면 독상은 모든 이가 적어도 주어진 음식에서 평등하다. 서양음식은 현대에 들어서 평등한 음식으로 배분된다. 1900년대에서야 프랑스식의 한상 차림이 사라지고, 러시아식 서비스가 들어온다. 러시아식 서비스란 요즘처럼 코스대로 요리가 나오는 방법이다. 음식의 온도를 잘 맞추고(식지 않고), 서빙과 요리가 편리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식사법이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유럽에서도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음식을 늘어놓고 먹었다. 그런 식사법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군주는 한상 차려놓은 가운데에서도 자기 먼저 음식을 먹었고, 그 다음에 부하와 시종들이 먹을 기회가 생겼다. 다시 독상 문화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품위 있고, 고결한 우주를 자기 안에 스스로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더구나 현대의 식당이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한국의 재활용이것은 엄밀히 말해 활용이 아니므로 ‘재사용’이거나 ‘재처리’라고 해야 한다을 막는 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반에 한 사람씩 찬을 차리면, 적은 양을 내게 되고 그걸 자기 몫이므로 모두 먹어내는 것을 기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도에서 4인상에 올라간 수십 가지 반찬은 ‘주인’이 없는 무책임한 반찬이다. 그러나 독상에서는 자기 앞으로 주어진 몫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결코 먹지도 않을 온갖 음식을남도 한정식에 마요네즈 샐러드는 웬말인가놓는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3.7%! 쌀을 제외한 우리 식량의 자급률이다. 37%도 아니고 한 자리 숫자에서도 저 밑바닥이다. 지금, 우리는 음식 문명의 한 위기에 놓여 있다. 독상 문화도 그런 면에서 한번 돌아볼 우리의 품위 있는 식사법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About 박 찬일

박 찬일
월간지 기자로 일하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ICIF에서‘요리와 양조’과정을, 슬로푸드 로마지부에서 소믈리에 코스를 마쳤다. 시칠리아 ‘파토리아델레토리’레스토랑에서 현장 요리 수업을 거쳤으며 2002년 귀국해 ‘뚜또베네’, ‘논나’, ‘라 꼼마’를 거쳐 현재 서교동 ‘몽로’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와인스캔들], [보통날의 파스타],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가 있으며 각종 매체에 음식과 와인에 관한 칼럼을 활발하게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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