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3명의 개인 셰프로 일한 요리사 자크 페팽(Jacques Pépin)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수습 요리사 자크 페팽은 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상호 영향으로도 요리를 배웠다. 레시피는 중요하지 않다. 그랑호텔 드 뢰로프의 주방에서 그의 감각은 날카롭게 단련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살짝 눌러서 고기가 익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귀는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로 사과나 아스파라거스의 신선도를 가늠하는 법을 익혔다. 주방에서는 오븐 속의 닭이 고기가 거의 다 익었다고 노래한다. 기름이 깔끔하게 빠지면서 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배와 오렌지, 토마토, 멜론이 제대로 익었을 때 어떤 향이 나는지도 배웠다.

자크 페팽은 수습 기간을 마치고 부르캉 브레스에서 파리로 옮겼다. 파리에서는 처음에 몽마르트 거리에 있는 르 막세빌Le Maxéville에서 일했다.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여성 현악 사중주단의 연주가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요리가 그에게는 너무 단순했다. 양배추 초절임과 고기가 들어가는 야채 요리, 양파 수프 같은 비스트로Bistro(포도주와 가벼운 음식을 파는 소규모 카페)음식들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독일에 점령된 기간 동안 독일 장군들의 단골 음식점인 르 뫼리스Le Meurice에서 요리했다. 여기서는 주방장이 메가폰에 대고 지시 사항을 말했다. 야채와 수프를 담당한 페팽은 지루해서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몽파르나스에 있는 라 로통드La Rotonde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어느 날인가 웨이터가 그를 주방과 홀 사이에 있는 문가로 부르더니 한 손님을 가리켰다. 손님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헝클어진 머리에 까만 안경을 쓰고 장례식 복장을 한 못생긴 남자였다. 추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흔적이 전혀 없었고, 접시 위로 고개를 깊이 처박은 채 책을 읽으면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음식점의 단골인 장 폴 사르트르였다. 라 로통드의 주방장은 히틀러 콧수염을 한 마지막 파리 남자였을 것이다. 자크 페팽은 그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은 뒤 그만두었다.

페팽이 다음으로 옮긴 곳은 르 플라자 아테네Le Plaza Athénée였다. 48명의 요리사가 일하는 전문적인 일터였다. 요리사들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주방 작업 체계에 따라 각 단계를 돌아가면서 일했다. 그들은 주방의 모든 분야에 전문 능력을 갖춘 만능 요리사들이었다. 모든 요리사는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해당 분야의 모든 기술을 배웠고, 일 년에 5주간의 휴가를 받았다. 전담 간호사가 따로 있어서 그들의 건강을 살폈고, 문학 책과 철학 책이 갖춰진 사설 도서관도 있었다. 센 강에는 전용 카누가 있었고, 축구팀과 농구팀도 있었다. 그들은 호강하며 지냈다. 그러나 결코 창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았다. 그곳 주방에는 자기표현을 위한 공간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이 주방의 불문율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손님이 누가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크 페팽은 이런 시스템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크 페팽은 드골 대통령의 요리사로서 군복무를 마쳤다. 그 후 프랑스를 떠나 1959년 9월 12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맨해튼 최고의 프랑스 레스토랑 르 파비용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에 신명이 나지 않았다. 미국 채소와 과일, 향료용 채소는 프랑스의 것처럼 깊은 맛이 없는 것 같았다. 소고기는 육질의 탄성이 떨어졌다. 대하와 지중해에서 나는 생선도 없었고, 파리의 주방에 있는 숯 그릴도 없었다. 여기서는 앙트르메티에로 일하는 요리사가 여섯 명이 아니라 한 명뿐이고, 그마저도 채소 그라탱만 만든다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를 더 실망스럽게 한 것은 권위적인 레스토랑 주인 앙리 술레Henri Soulé였다. 페팽의 눈에 그는 ‘호언장담하는 폭군’으로 보였고, 그의 고함치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레스토랑의 경제적 위기를 이유로 르 파비용 직원들의 임금은 몇 년 동안 인상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유럽의 귀족과 영화배우들에게는 돈을 제대로 받지 않을 때가 많았다. 캐비아, 샴페인, 디저트는 무료였다. 또 아주 유명한 사람은 르 파비용에서 돈을 낼 필요가 없었다.

페팽이 도착하고 8개월 뒤 갈등이 폭발했다. 주방장이 술레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다. 그러자 다른 요리사들도 그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자크 페팽은 프랑스의 집단 투쟁 방법인 라 브리가드 소트la brigade saute를 뉴욕에서도 시도하려고 모든 요리사가 동시에 그만두자고 제안했다.

페팽의 계획은 막강한 힘을 가진 뉴욕 요식업 조합의 귀에 들어갔다. 그들은 암흑가의 건장한 갱들을 레스토랑 주방으로 보냈다. 갱들은 가냘픈 페팽에게 계획을 단념하지 않으면 몸이 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뉴욕에서 일도 못하게 될 거라고 협박했다. 협박은 효과가 있었고, 라 브리가드 소트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요리사들은 차례로 병가를 냈고, 르 파비용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드골 대통령의 요리사였던 페팽은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부르캉 브레스의 수습 요리사이던 자크 페팽은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에서는 몰리에르의 작품을 다루었다. 그는 아카데미 경력을 계속 이어갔다. 다음 목표는 18세기 프랑스 문학사의 대표 작가에 대한 연구였고, 이어서 박사 학위까지 시도할 계획이었다.

페팽은 케네디 대통령 전담 요리사로 일해 달라는 백악관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당시 최대 규모의 레스토랑프랜차이즈 중 한 곳인 하워드 존슨Howard Johnson에서 일했고, 퀸즈에 있는 거대한 복합 물류 창고에서 기업의 수많은 가맹점을 위한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일류 요리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감행했는데, 자신이 만든 요리를 냉동했다가 가게에서 해동하도록 한 것이다. 페팽의 팀은 약 4,000리터에 달하는 수프 냄비에 뵈프 부르기뇽Boeuf bourguignon(부르고뉴 지방의 대표 요리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적포도주에 소고기와 야채를 넣고 푹 끓인 일종의 소고기찜)2,500인분을 한 번에 만들었다. 그들은 하루에 칠면조 1,500마리의 다리를 잘랐다. 소고기 육수를 끓이는 데는 소뼈 3,000파운드와 양파 200파운드, 셀러리 100파운드, 당근 150파운드, 토마토 페이스트 44리터, 소금 2자루, 후추 알갱이 1파운드가 필요했다. 페팽은 자신이 미국의 ‘음식 혁명’에서 군인의 역할을 한다고 해석했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서 ‘갖가지 요리법의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자기 앞에 열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인들, 특히 하워드 존슨의 고객들은 프랑스인들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세계는 개방적이지 않았다. 그사이 박사 학위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갖춘 자크 페팽은 지도교수에게 논문 계획안을 제출했다. 그는 문학 연구와 주방에서의 경험을 결합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프랑스 문학에 등장하는 음식에 대해서 연구할 생각이었다. 16세기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의 〈샐러드 찬가〉에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결혼식 피로연 음식을 거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마들렌 과자까지 짚어 보고 했다. 그러나 문예학 교수는 주제가 너무 통속적이라며 거부했다.

Jacques Pépin teaching a cooking class in the 1970s.

Editor’s Note : 독일 출신의 문화사회학자인 크리스토프 리바트의 신간 <레스토랑에서>. 레스토랑이라는 현대적 공간이 빚어내는 다층적 풍경을 조망한다. 리바트는 오늘날 우리가 열광하는 미식의 문화가 싹 트고 꽃을 피운 과정을 조목조목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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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독자의 손에서 물리적으로 펼쳐져 읽히는 책이라는 의미와 함께, 경계를 넘어서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사고가 담긴 책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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