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의 탄생] 최초의 식당문화와 비평이 자리잡기까지

| 초기의 레스토랑과 식당문화의 탄생

그리모와 마리 앙투안 카렘Marie Antoine Carême, 장 앙텔므 브리야 샤바랭Jean Anthelme Brillat Savarin 등의 미식저술가들은 음식물 섭취라는 육체적 행위를 미학적이고 지적인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독자들은 더 많은 종류의 식도락에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파리에서 서로를 자극하며 발전한 두 가지 사회 영역을 꼽자면, 요식업과 점점 커지는 대중 매체 세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프랑스 요리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면서 비로소 프랑스 요리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열성적인 레스토랑 고객들의 호기심이 아무리 커도, 그들은 주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들만 소비 공간과 준비 공간을 드나든다. 그 밖의 사람에게는 정선된 요리가 제공되는 화려한 공간과 김이 피어 오르는 주방은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 레스토랑의 성공은 여기에 토대를 둔다. 환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굴 요리 전문점으로 유명해진 베리 형제도 그렇게 했다. 그들의 레스토랑은 셰 베리Chez Véry(베리의 집)인데, 자기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무리 편안해도 집에 있는 건 아니다.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 중에서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1839년 레스토랑 베푸Véfour에서는 보병 장교 출신의 알퐁스 로베르라는 사람이 웨이터가 외상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도주병을 거울에 집어 던졌다. 그것은 아주 비싸고 상징적인 장면이었고, 세간의 이목을 끄는 소송으로 이어졌다. 보병 장교가 포도주병을 던진 행위는 레스토랑 베푸가 만들어 낸 우아함과 경쾌함의 환상을 파괴한다. 식사를 마친 뒤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오는 것도 환상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다. 음식이 아무리 훌륭해도 종업원과 고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 1900년대 레스토랑과 전설적인 요리사의 등장

1900년 무렵 미식가들은 화려하고 규모가 큰 궁전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특별 요리를 즐겼다. 거기서는 하루에 두 번 수백 명의 손님들에게 프랑스 전통의 호화로운 음식을 제공했다. 1889년 런던에 사보이Savoy 호텔이 문을 열었고, 1895년에는 스위스 장크트 모리츠에 팰리스 호텔Palace Hotel이, 1897년에는 함부르크에 피어 야레스차이텐Vier Jahreszeiten이 문을 열었다. 유럽과 미국의 부자들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곳에서 만났다. 런던에서든 장크트 모리츠에서든 소수의 상류층은 언제나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어디서나 캐비아와 랍스타가 나왔고, 접시 위에는 기름진 소스가 넘쳤다. 크레페 수제트Crêpes Suzette(얇게 구운 크레페에 오렌지 버터 소스를 넣고 끓이다가 오렌지 리큐어를 부어 불을 붙여 향이 배게 한 디저트. 식탁에서 직접 요리한다.)가 나올 때는 기품 있는 수석 웨이터가 직접 불을 붙였다. 그러면 파란색 불꽃이 타오르고 리큐어 향이 나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호텔 주인 리츠의 아내는 그렇게 하면 손님들이 〈적절한 예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했다.

그런 호텔에서 박봉을 받고 일하는 요리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고, 존중 받지도 못했다. 그들은 하루에 14시간, 15시간, 16시간씩 일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4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육체적 과로에다 대부분 창문도 없고 공기가 통하지 않는 주방 구조 때문이었다. 요리사들은 광부들보다 많은 직업병에 걸렸다. 그들은 만성적인 산소 결핍과 폐결핵, 정맥류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영양 결핍인 경우도 많았다.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Georges Auguste Escoffier는 그 세계 출신이었다. 그는 요리사로서 그 세계를, 레스토랑의 홀과 주방을 개혁했다. 1903년에 출간된 『요리 안내서Le Guide Culinaire』는 개혁자의 면모를 보여 주는 저서였다. 에스코피에는 음식이 음식처럼 보여야 한다고 했다. 접시 위에 놓인 모든 것을 실제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조는 장식적인 그 시기에는 혁신적이었다. 에스코피에는 요리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진하고 강한 소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소박한 시골 음식에서 영감을 얻어 요리할 때가 많았다. 그는 음식의 조리법을 따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고, 손님이 음식의 재료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에스코피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창의적인 이름을 붙였다. 피치 멜바Peach Melba(반으로 자른 복숭아를 시럽에 끓여 식힌 다음 복숭아의 움푹 들어간 곳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넣고 라즈베리 소스를 얹은 디저트.)를 개발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넬리 멜바에게 바쳤다. 흰색 트뤼프 버섯이 들어간 맑은 수프인 콩소메 졸라Consomm Zola는 유명한 작가 에밀 졸라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 차게 식힌 닭가슴살 요리 쉬프렘 드 볼라이유 자네트Suprmes de Volaille Jeannette는 북극 탐험 중에 난파된 자네트 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는 새로운 요리 개발에 대한 저작권이 보호되지 않는다며 탄식했다.

에스코피에는 무엇보다 분업 이론가였고, 분업으로 요리를 완성하게 했다. 그의 주방에서는 담당 분야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로티쇠르Risseur(구이 담당), 소시에Saucier(소스 담당), 파티시에Patissier(제과 담당), 가르드망제Gardemanger(찬 요리 담당), 앙트르메티에Entremetier(채소와 달걀 담당) 등이 있었다. 이전에는 요리사 한 명이 외프 마이어베어Oeufs Meyerbeer를 완성하려면 15분이 걸렸다. 그러나 에스코피에의 주방에서는 앙트르메티에가 계란을, 로티쇠르가 양고기를, 소시에가 소스를 준비할 때까지 단 몇 분이면 충분했다. 새롭게 조직된 주방은 더 깨끗하고 공기도 잘 통하고 환했으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안전했다. 무엇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에스코피에는 그 일이 왜 그처럼 절실하게 필요한지 정확히 간파했다. 20세기 초의 손님들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레스토랑 주인도 손님들에게 적절하게 예우받는 느낌을 주는 것에 중점을 둘 수 없었다. 물론 웨이터들은 여전히 리큐어에 불을 붙여 줄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긴 식사 시간과 정선된 요리에 대한 관심이 더는 보장되지 않았다. 에스코피에는 현대의 손님들에게 음식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눈’만 있다고 했다. 그로써 다시금 음식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레스토랑을 찾는 지점에 이르렀다.

 

| 최초의 미식안내서와 비평의 시작

20세기 초에는 레스토랑이 어땠을까? 엘리트적이고 귀족적인 요소는 곧 밀려났고, 중산층이 음식점들을 장악했다. 그 무렵 베를린에는 아싱거 비어크벨레Aschinger Bierquellen라는 체인점이 확산되었다. 베를린의 각 구역에 신속한 서비스를 표방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10여 곳이 들어선 것이다. 거기서는 비어부어스트Bierwurst(훈제한 햄이나 소시지로 ‘비어’라는 이름에서 주로 맥주와 함께 먹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와 감자 샐러드를 팔았고, 갓 구운 빵을 무료로 제공했다. 체인점의 본사가 음식을 대량으로 생산했는데, 1904년에 벌써 200만 개의 비어부어스트를 생산할 수 있었다. 아싱거 체인점은 942개의 계란을 동시에 삶을 수 있는 장비도 발명했다. 양념을 빻는 절구도 기계식으로 작동했다. 시금치 초록, 가재 빨강, 브라운소스 등의 착색료를 통해서는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 그러나 대량 생산과 음식의 균일화가 반드시 대중의 자동화된 태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1907년 서서 마시는 아싱거 비어할레에서도 사람들이 아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줄 안다고 했다. 그는 소시지를 얹은 빵에 갈색 겨자를 바르고 헬레스Helles(독일 맥주의 한 종류로 옅은 갈색을 띤 일반 맥주이다.)를 마셨다. 그런 다음 한 잔을 더 마신 뒤 총평을 했다. “그래, 인간은 원래 그렇지.”

프랑스적이고 귀족적인 것의 보루였던 뉴욕의 일류 레스토랑도 그저 다른 수많은 음식점들 중 하나가 되어 갔다. 1918년 한 전문가는 뉴요커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점 유형이 50여 개에 이른다고 했다. 독일에서 처음 생긴 자판기 레스토랑도 그 중 하나였다. 미국에서는 이미 1870년대부터 가격이 저렴한 새로운 음식이 등장했다. 잘게 자른 육류를 다져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구운 음식인데, 일부 스테이크처럼 고기가 질기지 않았고, 처음에는 ‘스테이크 햄버그’라고 불렸다.

마르셀 루프와 모리스 에드몽 사양은 프랑스 전역을 여행한 뒤 28권으로 된 미식 안내서 『프랑스의 식도락La France Gastronomique』를 출간했다.

전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최고의 음식은 고급 호텔에서 나왔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한눈에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워졌다. 곳곳에 수많은 음식점이 생겨났고, 그런 곳의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일일이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음식을 소개하는 책들은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일단 정보를 얻은 다음에야 음식을 먹으러 갔다. 마르셀 루프Marcel Rouff와 모리스 에드몽 사양Maurice Edmond Sailland은 프랑스 전역을 여행한 뒤 28권으로 된 미식 안내서 『프랑스의 식도락La France Gastronomique』을 출간했다. 이들의 저서는 자동차의 보급으로 사람들이 프랑스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국유 철도 SNCF와도 함께 작업했다. 퀴르농스키Curnonsky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사양은 〈여행과 미식의 신성 동맹〉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거론한 음식점들을 종류별로 등급을 매겼고, 귀족음식과 부르주아음식, 지역음식과 시골음식들로 나누었다. 이런 등급에서 미슐랭 별점 체계가 탄생했다.

자칭 교양 있는 관찰자들은 그러한 미식 안내서들이 별 소용이 없다고 여겼다. 1921년 찰스 로즈볼트Charles J. Rosebault는 『뉴욕 타임스』에 진정한 미식가는 ‘잃어버린 종족’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레스토랑을 찾는 야만인들을 언급했는데,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재즈’를 듣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는 더없이 훌륭한 음식들이 둔감한 식도로 사라진다고 보았다.

 

Editor’s Note : 독일 출신의 문화사회학자인 크리스토프 리바트의 신간 <레스토랑에서>. 레스토랑이라는 현대적 공간이 빚어내는 다층적 풍경을 조망한다. 리바트는 오늘날 우리가 열광하는 미식의 문화가 싹 트고 꽃을 피운 과정을 조목조목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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